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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훈의 자상어보] 할머니의 들기름, 아버지의 들기름

㈜이앤 노영훈 대표이사 (사회복지사)

1985년 쯤 여섯 식구가 되었다. 할머니가 오신 것이다. 할머니가 오시면서 집안에는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 

우선 할머니방에는 술병들과 그병보다 약간 큰 병들이 방모서리에 줄을 서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냄새를 맡아보니 술병의 내용물은 들기름이었고 다른 병은 활명수라고 적혀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항상 있었다. 할머니는 식사하기 전에 들기름병을 꼭 갖고 오셨고 들기름을 한 수저 드시고 밥을 드셨다. 

식사를 마치신 후에는 활명수를 드셨던 것이 생생히 기억난다. 신기했던 할머니의 식습관을 보고 부모님께 여쭤보고 싶었지만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할머니를 관찰하기도 했다. 정말 꼬박꼬박 세끼모두 식전엔 들기름. 식후엔 활명수. 할머니는 철저히 드셨다. 

할머니의 빈병을 기다리는 이유도 있었다. 엿장수 아저씨의 가위질 소리. 신나게 엿 바꿔 먹기 위해 찾은 병. 아무리 찾아도 없다. 어머니는 항상 나보다 빨랐다. 그렇게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우리집은 어느새 기름집처럼 되어갔다. 

연세가 많아지면서 할머니는 점점 기력을 잃어가셨고 끝내 자리에 누우신다. 가끔 어머니의 심부름 “영훈아 기름병 가져온나!”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식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힘없이 누워만 계시는 할머니를 멀뚱멀뚱 바라 볼 때가 많았다. 

할머니가 손수 드셨던 식습관대로 어머니는 미음을 떠드리기 전에 들기름 한 수저를 드린다. “아이고 잘 드시네요. 훌떡 일어 나셔야지요” 할머니 식사를 챙기시던 모습. 참빗으로 머리를 빗겨주시던 모습. 즐겨 입던 흰 한복을 입혀주시던 모습.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 어머니와 눈으로 말씀하시며 웃곤 하셨던 할머니. 방문을 열면 커다란 오톨도톨한 눈깔사탕을 가끔 주셨던 할머니. 아버지로부터 “너는 아직도 천지(天地)를 모르구나!”를 자주 들었던 그 시절. 들기름 냄새가 싫어서 밖에서 더 놀다 늦게 들어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들기름이 도대체 얼마나 좋은 것일까? 콜레스테롤 제거, 피부미용, 빈혈 개선 효과, 두뇌발달, 흰머리 억제, 풍부한 오메가3 성분, 성인병 예방, 알레르기 체질 개선 등 다양한 효능이 있다. 특히 들기름에 포함 되어있는 오메가 3은 혈관을 확장 시켜주며, 뇌신경을 발달시켜주고,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며, 유방암의 발병도 막아준다고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발생하기 쉬운 고지혈증, 혈액 관련 질환 등 성인병 예방에 매우 효과적이라고 하니 안 먹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젠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때 할머니의 연세처럼 되었다. 할머니를 위해 짜고 또 짰던 들기름! 이젠 내가 할 일이다. 제대로 짠 들기름을 들고 찾아봬야겠다. 아버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는듯하다. “도시에서 사오다니 천지(天地)를 모르구나! 국산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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