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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설이 받아두는 각종 낙상·안전사고 동의서의 법적 의미도 분명해졌다. 동의서는 위험을 설명하고 보호자와 정보를 공유했다는 자료가 될 수는 있지만, 시설이 부담하는 안전관리의무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이미지=AI) |
요양원 입소 다음 날, 어르신이 건물 밖으로 나가 담장을 넘어 4.85m 아래로 추락했다. 시설은 보호자로부터 ‘자의로 발생한 사고에 대해 일방적으로 시설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동의서까지 받아뒀지만 법원은 이를 시설의 손해배상책임을 면제하는 근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북부지방법원은 2026년 8월 11일 선고한 판결에서 요양원의 안전관리상 과실을 인정하면서도 사고의 이례성과 이용자의 행동 등을 고려해 시설 책임을 20%로 제한했다.
사고는 입소 다음 날 오전 9시께 발생했다. 어르신은 요양원 3층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간 뒤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이후 2층 계단 부근 담장을 넘어 약 485cm 아래 축대 밑으로 떨어졌다. 이 사고로 외상성 경막외출혈과 외상성 두개내출혈 등 12주 치료가 필요한 상해를 입었다.
사고에 앞선 징후도 있었다. 같은 날 새벽 4시께 어르신이 이미 3층 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일이 있었다. 실제 추락은 약 5시간 뒤 발생했다.
요양원 운영자는 업무상과실치상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았다. 검찰은 추락 위험이 있는 담장에 펜스나 안전망을 설치하지 않은 점, 외부로 이어지는 거실 문을 적절히 관리하지 않은 점, 종사자들에게 어르신을 세심히 관찰하도록 충분한 지시를 하지 않은 점을 과실로 봤다.
1심은 금고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고, 항소심은 벌금 1,500만 원으로 형을 변경했다. 형사판결은 2026년 6월 확정됐다. 이어진 민사소송에서 운영자는 어르신이 스스로 담장을 넘어 추락할 것까지 예견하기 어려웠고, 해당 출입문은 비상대피와 관련돼 있어 임의로 잠글 수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확정된 형사판결에서 인정된 사실은 민사재판에서도 유력한 증거가 되며, 이를 배척할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형사판결과 다른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시설이 받아놓은 면책 관련 서류였다.
요양원은 장기요양급여 이용약관에 이용자 본인의 고의 또는 중과실로 상해가 발생한 경우 시설에 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취지의 조항을 두고 있었다. 보호자로부터도 ‘자의에 의해 사고가 발생한 경우 일방적으로 시설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낙상위험성 설명·동의서를 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이러한 조항을 시설의 불법행위 책임까지 면제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할 수 없다고 봤다. 설령 면책조항이 적용되더라도 사고가 오로지 이용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만으로 발생한 경우에 한해 시설이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시설의 관리상 과실이 사고에 함께 작용했다면 동의서만으로 책임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법원은 사고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었고 어르신이 스스로 담장을 넘는 행동까지 시설이 구체적으로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했다. 이에 치료비와 개호비 약 4,258만 원 가운데 시설 책임을 20%인 약 851만 원으로 제한하고 위자료를 추가로 인정했다.
이번 판결은 입소 초기 어르신에 대한 관찰과 이탈 위험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보여준다. 특히 사고 당일 새벽 이미 출입문을 열고 나간 사실이 확인된 만큼 이후 관찰 강화나 직원 간 인계, 출입동선 점검이 어떻게 이뤄졌는지가 책임 판단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결국 남는 질문은 서명을 받았느냐가 아니다. 시설이 위험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시점에 실제로 어떤 조치를 했느냐이다.